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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명장 최영: 시대적 배경, 인물됨, 주요 업적과 관련 일화

타임머신 2024. 10. 26. 20:28

최영(崔瑩, 1316-1388)은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무신이자 명장으로, 충정왕부터 우왕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고려 왕조가 겪었던 혼란과 변화의 시대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특히, 최영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청렴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헌신한 그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까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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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심 최대명이 그린 국가 표준영전 최영의 초상화와 최영장군의

1. 시대적 배경

최영이 활동하던 고려 말기는 외세의 침입과 내부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시기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홍건적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의 북방 방어선이 약화되면서 국가의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받았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원 자주 정책과 권문세족의 부패가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흥 무신세력과 구세력 간의 갈등이 팽팽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최영은 고려의 안보를 수호하고자 적극적으로 외적과 싸우며 군사적 공적을 쌓아갑니다.

 

2. 인물됨

최영은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자랐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일화로,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부귀영화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가르침은 최영의 인생관에 깊이 자리 잡았고, 평생 부귀영화를 좇지 않고 공평하고 청렴한 자세로 무장에 임했습니다.

최영은 강직한 성품 덕분에 고려 무신 가운데서도 군사적 능력뿐 아니라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생전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강직함과 청렴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상징적 구절로, 권력과 금전을 멀리하고 오직 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줍니다.

 

3. 주요 업적

   3.1 홍건적 격퇴와 왜구 토벌

최영은 특히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탁월한 군사적 공적을 세웠습니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피난길에 오르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군을 이끌고 개경을 수복하여 고려의 위신을 지켰습니다. 이 승리로 최영은 국가의 안위를 수호하는 무신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왕과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또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최영은 적극적으로 왜구 토벌에 나섰습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해양 방어 체제를 강화하여 백성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에게 안정을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3.2 명나라와의 외교 및 북벌 계획

최영은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특히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북벌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북벌 계획은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들이 있는 요동 지역을 정벌하여 고려의 북방 영토를 확장하고 자주적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북벌 계획은 고려 내부의 반발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결국 무산되었으며, 훗날 최영과 신흥 무신 세력 사이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3 이성계와의 갈등 및 최후

최영은 고려 왕조의 무신으로서 왕권을 지키는 데 충성을 다했으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이성계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최영은 북벌 계획을 고수했지만, 이성계는 이를 반대하며 ‘사불가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북벌을 반대하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왕에게 간언한 것으로, 고려 말기 외교와 군사적 갈등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결국 최영은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전격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1388년 정변 이후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최영은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그의 충직함과 애국심은 후대에 걸쳐 큰 평가를 받으며 고려 말기의 대표적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4. 관련 일화

최영에 얽힌 일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청렴한 성품을 보여주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구절입니다. 이 이야기는 최영이 젊은 시절 군사 훈련 중 황금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그는 부패와 사치를 멀리하고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무장으로 존경받았습니다.

또한, 최영은 왕명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왜구를 토벌할 때에도 전리품이나 상급의 보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모든 공을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는 데 돌리려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철저한 청렴함과 충직한 자세는 고려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을 더욱 늘어나게 했습니다.

 

마무리하며...

최영은 고려 말기의 혼란 속에서 국가와 왕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그의 충성과 강직한 성품은 고려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최영은 고려의 안보를 위해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고, 명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등 고려 말기 중요한 군사적·외교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록 정치적 갈등과 정변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의 업적과 정신은 고려를 넘어 조선 시대에도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최영의 생애와 업적은 왕조가 바뀌는 혼란 속에서도 국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아 헌신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